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퇴근길 변경(뒷골목의 즐거움) 2

LateButNotTooLateToDream 2016. 8. 26. 10:02

2016.8.26. 골목길의 탐방 세번째



이번 주제는 용봉정, 승용사로 정했다.

용봉정은 가을 불꽃축제 포인트 물색 겸해서 올라가 보고, 노량진 근린공원 우측 흑석동 골목길을 훑어 볼 요량이다.


퇴근할 시간이 되니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비가 뿌리기 시작한다. 일기예보를 보니, 내일 오전 시간 중에 언제까지 비가 올지 몰라 자퇴를 하루 쉬고 직원들이랑 술이나 마실까 하는 마음이 생긴다.

여름 인사 이동 때 광주, 전주에서 올라 온 후배들이 신입으로 첫 부임한 부산에서 같이 본 인연이 있어 따로 술자리를 마련한다는게 자전거 출퇴근을 핑계로 비 오기 만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. 그런데, 이것도 때가 안 맞으려니, 오늘 동기들 약속이 있단다.


집에 확인하니 사당동은 비가 안 온다니, 자퇴로 방향 전환.

처서 지난 덕분인지, 빗물이 닿는 촉감이 서늘하다. 자전거도로에 빗물의 흔적이 남아 있는 걸 보니 비가 순간적으로 많이 내린 모양이지만, 옥수역을 지나니 이 곳은 전혀 비가 오지 않았다. 후배들 선약이 고마운 순간이다.


두번째라고 용봉정 올라오는 길이 한결 수월하다.....라고 해야 되는데, 여전히 그러하다.


용봉정 앞은 나뭇잎이 무성해서 앞이 보이질 않는다. 그 위로 더 올라가니 뷰포인트가 나오긴 하는데, 바로 뒤가 재건축지역이라 공사용 울타리로 막혀 있어 더 이상 올라갈 수가 없다. 아파트가 들어선 이후에는 이 곳이 배후공원 역할을 할 것으로 보여 지금처럼 한적함을 기대하기 어려울 듯하다.


동양중학교 아래 동네가 진사들의 새로운 요충지가 되지 않을까?  동네 주민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옥상에 올라간다면 용봉정에서 보다 더 나은 사진이 나올 수도 있겠다 싶다. 동양중학교 옥상도 괜찮고, 열어만 준다면야.


흑석동으로 가는 길이 상도동으로 가는 길보다 훨씬 짧고 완만한 길이 이어지는가 싶지만, 승용사 올라가는 길은 헛웃음만 나온다. 일전에 이 길을 한 번 올라 온 적이 있어 경사도를 이미 알고는 있지만, 그때보다 더 힘들다. 차라리 모르고 와야, 짧은 맛에 가벼운 도전의식이라도 생기지, 흥미는 없고 지나가야 하는 길이기에 그냥 올라선다.


지금 길이의 두배만 되어도 자전거로 안 올라온다.


승용사 맞은편으로 고구동산 둘레길의 일부이면서, 임도 같은 아주 짧은 비포장의 흙길이 나온다. 여기서 조금 전의 고통을 잊어버린다.

 

강남초등학교 앞 일방통행 길을 따라 이어지는 길에서 살짝 변화를 줘 상도 래미안 2차 방향으로 꺾었더니 이 동네 골목길 경사도도 만만찮다.   


사흘 동안 지도도 보고, 이리저리 돌아다니니 퇴근길 상도동, 흑석동 골목길이 대충 눈에 익어간다. 



흑석동을 지나가니 옛 추억이 하나 떠오른다.


흑석동은 대학 다닐 때 고시원(공부 열심히 한 것 같지만, 그냥 방값이 싸서 신일고 옆 허름한 곳에서 좀 살았다) 식당 아주머니가 숙대 앞 와플 가게를 보고 와서는 그 장사 한 번 해 보고 싶은데, 와플 제조기를 알 수가 없다고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다. 가게 주인한테 물어봐도 안 알려준다고. 그 당시 와플은 전국에 그 집 딱 하나였다.


이 분 남편이 나랑 이름이 똑같아 내 이름 부르기가 거시기하다고 해서 그때부터 '소팔'이라는 별명으로 학교에서 불리웠는데...(회상이 뭐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막 가지) 


아무튼 제조기 품번, 제조 국가만 알면 아는 오퍼상을 통해 구입하고, 와플 원료는 먹어보니 무슨 재료를 쓰는지 알겠다고  제발 정보만 좀 알아달라고 저녁 밥상머리에서 간곡히 부탁을 하니(특별 반찬을 더 주지 않았나 싶기도), 젊어서인지 객기인지 잘 나서던 시절이라 주말에 본의아니게 아주머니랑 둘이서 숙대 앞 데이트를 나갔다. 


정문 앞이라 더 그런지 숙대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는 와플가게는 통유리로 되어 있어, 다행히 와플 제조기 뒷면이 바깥에서 보이는 구조였다.  품번 등등 제품 정보는 뒷면에 100% 다 있지 않은가? 그때는 휴대폰도 없었고, 지방에서 올라 온 학생이 술 마실 돈은 있어도 사진기 살 돈이 있을리 없으니 눈으로 확인하고 종이에 메모할 수밖에 없다. 가게 주인이 마침 있어 대놓고 적을 수는 없어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면서 보고, 적고를 반복하니, 이 놈이 뭐하는 놈인가 하는 수많은 눈들과 마주해야 했는데, espionage의 즐거움이 커서 부끄럽거나 당황할 틈이 없었다.


이후 아주머니는 와플 기계를 들여와 중앙대 근처에서 성공적으로 창업을 했고, 고시원 식당은 그만 두고 가게에 전념할 수 있을 정도로 안정적이 되자 우리(셋이 같이 다녔다. 나이 많던 형은 미국으로 이민 가고, 고등학교 동기이기도 한 친구는 부산에서 변호사 한다)를 초대했고,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경도 못한 와플을 공짜로 소스(맞나? 잼, 크림 같은 거) 별로 다 먹어 본 촌놈이 되었다. 아주머니는 많은 돈을 버셨다는 전설이...


그게 흑석동을 밟아본 처음 인연이었는데, 이제 그 옆 동네에 살면서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다 보니, 와플가게가 어디에 있었는지 전혀 모르면서도 그때 생각도 나고 해서 흔한 말로 감회가 새롭다. 


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 했었나. 새로운 경험보다는 과거의 추억이 더 많은 나이가 된 건가. 아직은 추억보다 새로운 경험이 더 좋은데, 몸과 마음이 잘 안 따라 올려고 한다. 지금 이 상태가 너무 편안하기 때문에 안주하려는 탓도 있을 것이다.  


어린 시절처럼 무모할 수는 없겠지만, 그래도 자꾸 새로운 것을 해보고 싶다. 그래서 만든 호가 '늦꿈' 아닌가 말이다.